2016년 5월 31일 화요일

박인로의 성경충효-오륜가, 선상탄, 조홍시가를 중심으로

박인로의 성경충효-오륜가, 선상탄, 조홍시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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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박인로의 생애

2. 성경(誠敬)
- 오륜가를 중심으로

3. 충(忠)
- 선상탄을 중심으로

4. 효(孝)
- 조홍시가를 중심으로


본문
1. 박인로의 생애
박인로는 1561(명종 16)∼1642(인조 20) 조선 중기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는 무인으로도 활약하였다. 그의 82세의 생애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보면, 전반생이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고 한다면, 후반생은 독서와 수행으로 초연한 선비요, 문인 가객으로서의 면모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어려서부터 시재가 뛰어나 1573년(선조 6) 13세의 나이로 「대승음」이라는 칠언절구의 한시를 지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32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동래 울산 경주지방을 비롯해 영양군까지 잇따라 함락되자 분연히 붓을 던지고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38세인 1598년(선조 31)에는 수군으로 종군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웠다. 1599년(선조 32) 무과에 등과하기도 하였다. 그의 후반생은 독서수행의 선비이며 가객으로서의 삶이었다. 곧, 문인으로서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은거생활에 든 40세 이후로, 성현의 경전 주석 연구에 몰두하였다. 밤중에도 성현의 기상을 묵상하기 일쑤였다. 또한, 꿈속에서 성 경 충 효(誠敬忠孝)의 네 글자를 얻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자성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말년에는 자연을 벗하여 안빈낙도하는 삶을 살다가 1642년(인조 20)에 세상을 떠났다. 영양군 남쪽 대랑산에 안장되었다. 죽은 뒤에 향리의 선비들이 그를 흠모하여 1707년(숙종 33)에 생장지인 도천리에 도계서원을 세워 제향하고 있다.
그는 비록 후반생부터 문인활동을 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매우 풍요로워서 정철에 버금가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3권 2책으로 이루어진 『노계집』과 필사본 등에 실려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시가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비록 시조를 즐겨 지어 완전히 생활화했지만, 국문학사상 의의는 가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문학적 재능도 가사에 더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키워드
성경충효, 조홍시가, 박인로, 오륜가, 성경, 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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